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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가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면서 여순항쟁이 시작되었다. 여순항쟁이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군 형성 과정과 당시 남한 사회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해방 직후 남한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새로운 나라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각기 다른 출신과 입장에 근거해 군사단체들을 만들었다. 세력들은 주요하게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군, 일본군 그리고 만주군 출신이었다. 해방된 지 불과 3개월 여의 기간 동안 30여 개의 군사단체가 만들어졌다. 그중에는 일본 경찰로부터 인수한 무기로 자체 훈련을 실시하는 곳도 있었다. 이러한 자생적인 군대 창설 움직임은 미군정이 들어서며 좌절되었다. 미군정은 이러한 움직임을 치안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판단했고 이들 군사단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강제해산시켰다. 아울러 미군정은 1946년 1월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는데 지휘관 임명에 있어 과거의 군사경력 등을 우선시해 정규군이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 세력을 주요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럼에도 국방경비대원 모집 과정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특별한 제한이나 사상검열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자생적 군사단체를 대체할 군대 조직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초기 국방경비대는 공산당원부터 반공주의자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국방경비대의 또 다른 특성은 국가 차원의 모병이 아닌 인근 지역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향토부대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 국방경비대에서는 인사 변동이 잦은 고위급 지휘관이 아니라 하사관과 사병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14연대 집단행동의 시작에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또한 14연대의 출병 명령 거부가 여수를 넘어 순천 등 인근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것은 당시 남한의 사회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방 후 남한 사회는 크게 세 가지 공동의 과제를 갖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친일파 등 반민족행위자 처벌, 경제적으로는 토지개혁,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자주·독립·통일국가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며 친일 청산이라는 남한의 정치적 과제 해결은 요원해졌고,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경제는 사실상 파탄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한 남한은 1948년 8월, 북한은 1948년 9월 제각기에 독립적인 정치권력이 들어섰기에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는 더욱 멀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14연대의 집단행동이 여수·순천지역의 시민사회적 요구와 맞물리며 항쟁으로 전개되는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항쟁은 채 열흘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순항쟁은 이후 한국군과 한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여파를 가져왔다. 군대 내의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숙군이 전개되었으며, ‘빨갱이’라 통칭되는 내외의 이념적 적을 상정한 강력한 반공정책(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전 사회적으로 추진되었다. 반공이념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빨갱이’ 사냥의 시작이었다. 이후 2년 가까이 지나 발발한 한국전쟁이야말로 반공국가 완성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19혁명의 결과로 이승만이 물러난 이후에도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독재정권이 오래 지속되었다. 이 기간 역시 국가의 가장 큰 목표는 변함없이 반공이었다. 반공 정권하에서 개인의 사상적 자유와 사회의 민주주의는 가히 질식이라고 할 만한 숨 막히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4연대의 명령 거부와 여순항쟁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념적 갈등의 본격적 발화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스러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