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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곡계굴

광역지방자치단체
충청북도
기초지방자치단체
단양군
사건연도
1951
가해주체
미군
사건유형
학살
세부사건
폭격/폭파
장소유형
안내판
1 more property

위치

(곡계굴) 단양군 영춘면 상리 129 (무연고자 묘지) 단양군 영춘면 강변로 850-31에서 출발

해설 영상

장소 소개

곡계굴 공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
곡계굴. 현재는 입구를 막아놓았다.
답사를 위해 만난 단양곡계굴 유족회 조병규 회장은 곡계굴 폭격 당시 네 살이었다. 동굴이 갑갑했는지 계속 울어서 폭격 전날 밤 열세 살 고모의 등에 업혀 마을로 돌아왔다고 했다. 고모는 조병규 회장을 내려주고 곡계굴로 다시 돌아갔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곡계굴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이들 중 44%가 13세 이하의 아동이었고, 52%가 여성이었다.
1951년 1월 20일 미군 전투기 열세 대가 단양 곡계굴을 폭격했다. 당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강 이남까지 전선이 내려온 상태였다. 단양은 충북, 경북, 강원의 경계선에 위치한 격전장으로 인민군이 주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폭격 전날 인민군이 마을을 떠났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여럿 있었다. 주민들은 사건 십여 일 전부터 피난길에 올랐지만, 미군이 공무원이나 경찰 말고는 통과시키지 않아 대부분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주민들은 먼저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곡계굴로 피신시켰다. 영월과 태백 등에서 넘어온 피난민도 많았는데, 길이 막히자 같이 곡계굴로 숨었다.
미군은 피난민 무리에 인민군이 섞여 있을 가능성 때문에 피난을 막았다. 현장에 주둔했던 미10군단의 폭격 지침은 적과 적의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었다. 고립된 피난민에 대한 보호 조치는 고려되지 않았다. 곡계굴 바로 옆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었던 영춘면 상리도 불탔다. 조병규 회장의 집에는 기둥이 불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폭격으로 대부분의 집이 가족을 잃었고, 일가족이 모두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폭격 후 연고가 있는 시신들은 유족들이 수습했다. 피난민의 시신은 면에서 따로 수습해 무연고 묘지를 만들어 묻었다. 당시 작업을 맡았 던인부들은 360여 구의 시신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곡계굴 무연고 묘지 출발지점 부근에서 보이는 무연고 묘지 풍경. 숲 앞에 세워진 안내판 뒤쪽이 무연고 묘지다.
곡계굴 무연교 묘지 안내판
곡계굴은 위령비가 세워졌고 길가에 안내판도 있는 등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무연고자 묘지는 곡계굴 현장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다. 낮은 무덤 위에 풀이 무성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세운 유해 매장 추정지 안내판이 없었다면 묘지인 줄 전혀 모를 정도였다. 시멘트로 만든 작은 표석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묘지는 이미 한 번 개발로 인해 지금 있던 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또 주변을 밭으로 개간한다고 해서 묘지 턱밑까지 흙이 파헤쳐져 있었다. 곡계굴 위령비 주변에 흩어져 있던 사람 형상 의 작은 토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위령제를 지낼 때 상여를 메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은 당시의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널브러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2021년 9월, 무연고자 묘지 유해발굴이 결정되었다. 유해발굴이 완료되면 무연고자 묘지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곡계굴 무연고 묘지 곳곳에 있는 작은 표석
당시 곡계굴 피해자들의 모습을 재현한 토기. 곡계굴 위령비 주변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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