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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

광역지방자치단체
인천광역시
기초지방자치단체
중구
사건연도
1950
가해주체
미군
사건유형
학살
세부사건
폭격/폭파
장소유형
비석/탑
1 more property

위치

(월미공원 안내소) 인천 중구 월미로 131-31

장소 소개

월미공원 입구. 입구 오른쪽에 월미도 선주민의 호소를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월미공원 제1주차장에서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여러 개의 충혼탑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해군첩보부대 충혼탑’, 한국전쟁 직전 북한과의 교전에서 승리했다는 ‘몽금포작전 전승비’, ‘해군 제2함대사령부 주둔 기념비’ 등이다.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는 월미공원 안내소 바로 뒤편에 있다. 위령비는 성인 남성의 키 정도로, 앞서 본 전적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작다.
월미도는 조선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기에 외세에게는 가장 먼저 점령해야 할 섬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가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며 군함을 파견했을 때도 월미도는 군함외교의 관문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킬 때도 먼저 월미도를 점령했다.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
한국전쟁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던 인천상륙작전도 월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천에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키려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그 사전 단계로 월미도 점령 작전을 준비했다. 당시 월미도 서쪽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작전은 월미도를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50년 9월, 미 제15항모전단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은 월미도 동쪽지역 에 100여 발에 달하는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고 움직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관총을 발사했다.
당시 80여 가구의 주민이 살던 월미도 동쪽 지역은 불바다가 되었다. 작전은 오전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집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화마에 휩싸였고, 용케 집을 빠져나와 도망가던 사람들은 기총소사에 쓰러졌다. 그렇게 100여 명의 월미도 주민들이 학살되었 다. 마침 간조 때였기에 바닷가 뻘로 도망간 사람들은 개흙을 온몸에 칠하고 뻘의 일부처럼 숨어서 겨우 살아남았다.
해군첩보부대충혼탑
한국전쟁 전 월미도에는 이미 미군이 건설한 군사기지가 있었다. 미 정보부대도 월미도에서 근무했으므로 월미도 상황에 대해서 잘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전에도 미군은 수차례의 공중정찰을 실시했으며, 당시 정찰기가 촬영한 월미도 사진에는 민간인 거주지역이 잘 나타나 있다. 미군은 월미도 동쪽 지역에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심지어 작전은 민간인을 더 확실하게 살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생존자는 폭격기가 매우 낮게 날았다고 증언했다. 실제 대부분의 폭격이 300피트(약 100미터) 이하의 고도에서 진행되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높이에선 육안으로도 지상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도 폭격 작전을 시행한 부대가 충분히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으나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위령비의 문구는 간략했다.
“이 위령비는 1950년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 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건립하였다”
보통 위령비 뒷면에 희생자 명단이나 더 자세한 사건의 내용을 적기도 하는데 월미도 위령비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월미공원의 충혼탑과 전적비에는 수많은 글이 적힌 것을 생각하면 초라하기까지 했다. 부디 이 자그마한 위령비를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또 여기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더 많이 말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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