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1-26에서 출발
해설 영상
장소 소개
금정굴 입구
학살 현장은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다. 등산로 입구에 금정굴 학살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산비탈을 5분쯤 올라가면 현장에 도착한다. 현재 금정굴에는 보존을 위해 천막을 씌워놓았다.
금정굴 학살은 1950년 10월에 일어났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퇴각하자마자 지역의 우익청년단원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북한군 점령기 ‘부역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수복 뒤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대한청년단 등 우익세력은 자위대, 치안대 등의 이름을 걸고 경찰처럼 활동했다.
금정굴 학살 현장. 현재 천막을 씌워 놓았다.
고양지역에서는 태극단, 의용경찰대, 타공결사대 등의 단체가 ‘부역혐의자’ 학살에 가담했다. 이들은 주로 북한군 및 지역 좌익에게 받은 탄압에 대한 사적인 보복심으로 활동했지만, 일부는 본인이 ‘부역’한 것을 감추기 위해 더 극렬하게 ‘부역혐의자’ 및 좌익 색출에 앞장섰다. 자식이 북한 의용군에 지원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끌려왔고, 남편이 인민위원회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아내가 끌려왔다. 국민보도연맹원 역시 끌려왔다.
이들은 고양경찰서, 농협 창고 등에 감금되어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폭행 등의 가혹행위는 다반사였고 감금된 사람들에게 물도 주지 않아 오줌을 받아서 마셔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한강변에서, 일부는 일제시기 금광이었던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금정굴에서는 1950년 10월 한 달 간 최소 153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수직굴이었던 금정굴 입구에 5명씩 손을 묶은 채로 세워 총을 쏴 떨어트렸다고 한다. 이곳 부근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계속 전해졌지만, 사람들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시신이 부패해 땅이 무너지면서 학살의 흔적이 드러났다. 유족들끼리 서로 힘을 모아 1995년에 자체적으로 유해를 발굴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발굴 현장에서는 유해 외에도 학살 당시 사용된 M1 소총 탄피와 피해자들의 손을 묶었던 비비선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금정굴 학살 현장
굴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받침대를 설치해 놓았다.
금정굴 학살의 경우는 드물게도 한국전쟁 중 사건이 일어난 직후 유족들의 진정으로 정부 차원에서 수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증거들이 은폐된 후였고, 말단에 있는 치안대원 몇몇이 처벌받았을 뿐 고양경찰서 서장 등 주요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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