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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대구에 들어온 미군정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군정은 경북지사를 친일파로 임명하는 등 친일파 관리들을 그대로 재임용했고, 일제강점기 진보세력을 탄압했던 경찰들을 대거 기용했다. 대민 정책 역시 실패했다. 해방 이후 대구·경북지역에는 30만 명이 넘는 귀환동포가 들어와 인구가 급증했는데,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아 실업과 식량난 등의 문제가 만연했다. 식량 공출 정책도 가혹했다. 추곡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걷지 않았던 하곡까지 강압적으로 걷어 가면서 식량이 돌지 않아 기아 상태에 놓인 이들이 많았다. 농촌에서도 토지개혁이 지연되면서 지주-소작인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구·경북은 해방 직후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10월항쟁 이전부터 대중 집회가 빈번하게 열렸으며 학생들은 동맹휴학, 노동자는 파업, 빈민은 ‘기아 시위’, 농민은 시위나 봉기를 일으키는 등 다양한 투쟁이 벌어졌다. 미군정은 이를 좌익세력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았고 오히려 더 강압적으로 좌익을 탄압했다. 그렇게 미군정과 민중의 대립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10월항쟁이 터져 나왔다. 1946년 10월 1일 대규모의 대중집회는 9월 하순부터 전국노동조합평의회가 주도한 총파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9월 30일 파업이 미군정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10월 1일 오전부터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 광장에 모였다. 대구부청(현 대구시청)에서도 부녀자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빈민들의 식량 요구 시위가 벌어졌다. 저녁까지 이어진 대구역 광장 집회에는 5-6천여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시위 진압 경찰이 군중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10월항쟁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다음날 대구역 광장과 대구부청, 대구경찰서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대구역 광장에는 파업 노동자 시위, 대구부청 앞에는 부녀동맹 주도의 ‘기아 시위’가 벌어졌다. 대구역 광장에서 또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충돌 과정에서 민간인 10여 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 항쟁의 열기는 청년·학생 주도로 일어난 ‘시신 시위’에서 정점에 달했다. 대구의학전문대(현 경북대 의대), 대구사범대, 대구농업대 등 청년·학생 시위대가 전날 사망한 노동자의 시신을 들것에 메고 대구의학전문대에서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였다. 봉산국민학교(현 대구초등학교), 중앙통(현 중앙로), 경북도청(현 경삼감영공원)을 지나는 행렬에 중학생과 시민도 합세했다. 대구경찰서 앞 사거리에 만 오천여 명의 군중이 운집해 폭력 진압 중지, 살인 경찰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했고, 시위대는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100여 명의 인원을 석방시켰다.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구 시내 곳곳에서 군중들이 경찰이나 관리, 우익인사 등을 공격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오후 3시 경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에 나섰다. 대구경찰서 앞 시위대는 자진 해산했지만, 군중의 폭력 사태는 미군정이 오후 5시에 계엄령을 선 포한 뒤에도 이어졌다. 계엄령 선포 이후 경찰은 거리의 청장년 남성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했고 검문 불응자를 사살하기도 했다. 대구 시내의 항쟁은 끝났지만 이후 시위대가 경북의 대구 외곽으로 진출하면서 농촌지역으로 항쟁이 이어졌다. 가혹한 공출과 불평등한 지주-소작 관계로 불만을 가졌던 농민들이 대거 들고 일어났다. 특히 영천지역에서는 거의 전 군민이 항쟁에 참여했는데, 경찰서나 면사무소를 장악하고 경찰, 관리 또 악덕 지주를 공격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이 많았다. 농촌에서의 항쟁이 10월 6일경 대부분 진압되었음에도, 군경의 강경 진압은 계속되었다. 특히 경찰이 사법적 절차 없이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이 많았으며,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도 처형, 방화, 재산 탈취, 성폭행 등의 폭력을 일삼았다. 대구·경북지역에서 8,000여 명이 10월항쟁 관련자로 검거되었다. 가담 정도에 따라 일부는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폭력적 진압을 견디다 못한 이들 중 일부는 입산하거나 남로당에 가입해 야산대를 조직했고, 야산대는 빨치산 유격대로 발전해 저항 행동을 펼쳤다. 빨치산 활동과 그에 대한 군경의 진압은 한국전쟁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농촌 마을은 빨치산과 경찰 양쪽 모두에게 동원되면서, 특히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경찰이나 우익단체에게 엄청난 물리적 폭력을 겪었다. 10월항쟁을 심도 있게 연구해 온 김상숙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이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이러한 트라우마가 한국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탄압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기 좌익에 대한 대규모의 집단학살은 국민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완성하는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