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236
장소 소개
석달마을 학살을 알게 된 것은 전국유족회 공동의장을 지냈던 고 채의진 선생 때문이었다. 학살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채의진 선생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도, 군사독재 시절이 끝난 1987년에도 진실규명에 앞장섰다. 그가 국회와 국방부, 지역 위령제와 기자회견장, 학술행 사에 빠짐없이 찾아갔던 이유는 아마 그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사리 놓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진실화해위원회가 세워지고 문경 석달마을 학살 사건은 진실규명이 되었다.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 위령비 뒤쪽에 있는 석비에는 류춘도 시인의 시와 당시 사망한 12세 이하 어린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용선사 뒤편, 석달마을 학살 현장에 세워진 위령비의 이름은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다. 위령비 뒤편, 류춘도 시인의 시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시비 뒷면에는 당시 사망한 12세 이하 어린이 2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중 5명은 사망 당시 이름도 지어지지 않아 성씨와 ‘아기’로 만 기록되어 있다. 당시 마을 주민 126명 중 86명이 학살당했다. ‘공비’토벌을 위해 지나가던 군인들은 마을 주민이 빨치산에 협력했다며 마을을 불태우고 두 차례에 걸쳐 주민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 12월 24일의 일이었다. 생존자와 당시 문경경찰서 직원은 마을에서 빨치산 활동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령비가 있는 언덕 바로 앞의 밭이 첫 번째 학살 현장이다. 이곳에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총격을 가했다. 생존자는 살려주겠다고 말하자 살아남은 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군인들은 다시 총을 쐈다. 두 번째 학살은 위령비 부근에서 벌어졌다. 잠시 나가 있다가 마을로 돌아오던 청장년과 겨울방학으로 수업이 일찍 끝나 돌아오던 학생들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채의진 선생은 그들 중 한 명이었고, 거기서 형을 잃었다.
진실규명 이후 유족들은 국가배상 소송을 통해 일정 정도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국방부는 유족들의 보상금이 높게 책정되었다며 보상금을 일부 반환하라고 소송했고, 대법원은 이를 인용했다. 현재 마을 에는 주민들이 몇 남아 있지 않다. 1993년 5월 17일 석달마을 유족이 국가에 제출한 탄원서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잘못된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상처는 꼭 치유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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