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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역 소개

그들과 우리의 미래

대구와 경산, 영천에서 발견한 10월항쟁의 흔적은 모두 항쟁의 현장이 아니라 항쟁 참여자들이 학살당한 장소에만 남겨져 있었다. 항쟁과 그 탄압의 역사는 해방 이후 시작되어 한국전쟁까지 이어진 한국 정부에 의한 집단 학살의 역사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답사 과정에서 만났던 채영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족회장이 꺼냈던, ‘용기 있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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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산

분명히 있었던 것

1946년 10월 2일,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 앞 사거리에는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했다. 노동자, 학생, 빈민 등 온갖 사람들이 모인 시위대이자 운구 행렬이었다. 시위가 시작된 10월 1일, 대구역 앞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한 철 도노동자가 사망한 것이다. 이 철도노동자의 시신을 멘 운구 행렬이 대구의전(현  경북대 의대)에서 출발하자 시신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착지는 대구경 찰서였다. 그 앞을 가득 채웠을 울부짖음과 구호, 함성은 격동적인 저항의 외침이자 애도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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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전쟁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영천은 10월항쟁 당시 경북지역에서도 항쟁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 중 하나 였다. 그런 만큼 군경의 탄압도 극심했다. 미군정의 강경 진압 방침으로 대구 시 내에서 합법 투쟁이 어려워지자 대구의 활동가들도 농촌으로 이동해 입산했다.  농촌 주민 역시 탄압을 견디다 못해 산으로 들어갔다. 투쟁이 농촌 산간 지역의  유격투쟁으로 변화하면서, 군경은 입산자와 접촉 가능성이 높은 농촌 마을에 수시로 드나들며 약탈, 방화, 살인 같은 폭력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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