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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면사무소

광역지방자치단체
충청남도
기초지방자치단체
태안군
사건연도
1950
가해주체
남한군
경찰
우익단체
사건유형
학살
세부사건
보도연맹
부역혐의
장소유형
시내/마을
1 more property

위치

(태안면사무소)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로 54
(방앗간 창고 터) 충남 태안군 태안읍 서문4길 20-68에서 들어가는 골목 안쪽
(보도연맹 터) 충남 태안군 태안읍 경이정1길 32 맞은편 공터

장소 소개

목애당 앞 은행나무
현재 태안읍행정복지센터 부지가 한국전쟁 당시 태안면사무소였다. 그 옆에는 조선시대 때 관아로 쓰였던 목애당(牧愛堂)이 있다. 목애당 바로 앞 삼백 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옆 공터에 사기실재에서 소달구지로 실어 온 시신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사기실재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은 태안 전체에서 잡혀 왔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도 시신을 확인하려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 일대는 당시 면사문소뿐 아니라 경찰서, 소방서, 군청 등 중요 기관이 있었던 태안의 중심지였다. 태안경찰서는 아래에 위치한 경이정 쪽에 있었다. 북한군은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태안을 점령했고, 북한군과 이에 동조한 지방좌익은 경찰, 공무원, 지주, 재한청년단 등 우익 인사를 색출하고 숙청했다. 당시 서산시와 태안군 일대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죽은 이들은 333명에서 378명으로 추정되며, 태안군 소속 희생자는 최소 156명으로 추정된다.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10월 초, 군과 경찰을 시작으로 여러 행정 관리들이 태안으로 다시 복귀한다. 복귀하자마자 부역자 심사위원회를 설치해 ‘부역자’를 잡아들여 심사했고, 이후 ‘부역혐의’ 학살이 벌어졌다.
낡은 주택이 늘어서 있는 곳에 당시 부역혐의자를 가둬놓았던 방앗간 터가 있었다.
태안면사무소를 바라보고 뒤쪽 편에는 당시 부역혐의자를 가둬 놓았던 방앗간 창고 터가 있다. 현재는 당시 흔적은 없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다. 당시 태안경찰서 유치장만으로는 잡아 온 부역혐의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방앗간 창고를 빌렸다고 한다. 당시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라 날이 추웠고,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았기에 굶어 죽거나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잡아놓은 부역혐의자들을 심사하던 부역자 심사위원회에는 마을이장이나 지주, 치안대 등 우익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심사 과정에서 개인적인 복수심 같은 사적 감정도 개입되었다. 부역혐의자를 A, B, C급으로 분류해 A급은 처형, B급은 징역, C급은 석방처리 되었다고 하는데, 평소 앙숙이었던 집안이면 A급으로; 분류하고, 지위가 있거나 친한 사람의 집안이면 C급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뚜렷한 기준 없이 누군가의 지목만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흔히 ‘손가락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가락총’으로 사람이 죽어나갔던 것은 사실 태안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2024년 9월, 한국전쟁 기억여행으로 태안을 다녀왔을 때까지 당시 존재했던 보도연맹 사무실 건물이 그대로 있었지만 결국 철거되었다. 보도연맹 사무실은 맹원들을 관리했던 곳이었다. 태안 보도연맹원 명단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살생부가 되었다.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최초 이뤄졌던 보도연맹 학살이 이후의 학살과 연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의 친지가 가해자에게 보복(적대세력 학살)을 했고, 다시 그 피해자의 유족들이 가해자에게 보복(부역혐의 학살)을 한 것이다. 최초의 학살이 클수록 이후의 학살 규모 역시 커졌다.
철거되기 전 보도연맹 사무실. 오래된 단층의 빨간 벽돌집이다.
철거 후 보도연맹 사무실 터. 2026년 2월까지는 계속 부지만 남아 있었다.
답사를 맡아준 주철희 박사는 여수 토박이다. 만성리 해수욕장은 검은 모래로 유명한 곳인데, 어릴 적 이곳으로 친구들과 놀러갈 때면 어른들이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굴(마래터널) 지나면 움푹 파인 구덩이 하나 있다. 지나다 돌이나 하나 던져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성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던 것일까. 그 마음들은 그렇게 돌탑이 되어 쌓여갔다.
‘1948년 10월 19일 …… 2009년 10월 19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뒷면에 적혀 있는 글이다. 여순항쟁의 시작일과 위령비 건립일 사이에는 침묵의 말줄임 표만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세우며 여수시의 공무원이 ‘학살’이라는 말을 빼자고 완강히 버텼다 한다. 한 시인의 제안으로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줄임표를 새겼다.
차마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기에, 여섯 개의 마침표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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