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소개
추모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북한과 가까웠던 강화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이틀 만에 북한군에게 점령 당했다.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예비검속이 채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강화에서 민 간인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수복 이후 남한 전역에서 대대적인 ‘부역혐의자’ 색출 및 검거, 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강화에서는 우익청년단체를 중심으로 치안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들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거나 처형했다. 전선이 밀려 강화를 떠나야 했던 1.4 후퇴 시기에는 학살이 보다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사 슬재, 강화 양조장, 강화경찰서, 돌머리포구, 갑곶나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 다.
강화지역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옆에는 320여 명의 이름을 적은 작은 묘석 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다. 돌머리포구와 사슬재에서 학살되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분들을 모셔 놓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의 추모비는 탑이 아니었다. 보통은 높은 탑 형식의 추모비를 세우는데 이곳은 반이 갈라진 커다란 돌과 두 개의 돌 사이에 이음매 역할을 하는 돌이 끼워진 형상이었다.
답사를 맡아준 박흥렬 한강하구평화센터 대표는 이를 두고 둘로 갈라진 분단의 현실을 잇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그 해석에 공감 이 갔다.
강화 민간인 학살 안내판
위령비. 보통의 위령비와는 다르게 생 겼다. 커다란 두 개의 돌을 이음매 역할을 하는 돌이 이어 붙인 형상이다.
학살로 돌아가신 이들의 이름을 돌판에 새겨 놓았다.
수도권 접경지의 다른 장소 보기
강화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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