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소개
용산고개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 컨테이너에는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용산고개는 국도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을 올라가야 나온다. 길 오른쪽에 보이는 컨테이너에는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학살된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보통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하지만 유족들이 조상의 유해를 가까이 모시고 싶다는 마음에 이곳에 그냥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조선 말 농민항쟁이 있었고 일제시기에는 백정 해방 운동인 형평운동과 소작인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진주사범학교를 비롯해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10월항쟁이 진주지역에서도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여순항쟁 이후에는 지리산에 인접해 있었기에 빨치산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 되기도 했다.
컨테이너 안에 안치된 유해.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학살당한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의 유해다.
용산고개 학살 현장. 이곳의 유해발굴은 시민사회민간인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맡아서 진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국에서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벌였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이곳 진주에서도 어김없이 발생했다. 1950년 7월 중순, 진주시 및 진양군 지역의 보도연맹원이 대거 소집되었다. 평소에도 소집이 많았기에 보도연맹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집결했다. 진주경찰서 등지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은 심사를 통해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고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부터 차례로 학살되었다.
용산고개 인근 지역은 진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역시 국민보도연맹원과 진주형무소 재소자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매장했다. 당시 매장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시신 대부분이 40대 미만의 남성이었으며, 700여 구의 시신을 매장 했다고 증언했다. 이곳에선 2014년과 2017년에 시민사회가 결성한 민간인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두 차례 유해발굴을 했는데, 40여 구의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안내를 해준 진주유족회 정연조 회장은 유해발굴지 주변에서 무언가를 주워들더니 이빨이라고 하면서 보여주었다. 아직도 비가 오면 단추나 탄피 같은 것이 발견된다고 했다.
정연조 회장의 아버지는 스물여덟 살 때 희생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오라하니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다. 죄가 없으니 떳떳하 게 경찰서에 간 것인데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물과 쌀을 떠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당시 아이였던 정 회장이 “할머니 뭐하는데?” 하고 물으면 할머니는 “느그 아버지가 찾아올 란지 모른다”라고 답했단다. 기다림의 시간은 어느새 7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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