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소개
위령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아! 아! 꿈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순간의 비명소리! 저 하늘이 울고 저 신령이 통곡하던 그 날! 시냇물이 오열하고 산새가 울부짖던 그 날!”
이곳은 경남 산청군 시천·삼장지역에서 1949년 7월부터 1950년 1월까지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학살은 여순항쟁과도 연관이 있다. 여순항쟁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은 이곳 인근에서도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군경 합동사령부를 구성해 토벌작전을 펼친다. 토벌대는 산속의 빨치산을 찾아 작전을 펼치는 한편, 산간지역의 마을이 빨치산의 거점이자 식량 등 보급처 역할을 한다고 판단해 주민들을 내쫓거나 빨치산 협력자를 색출했다.
1949년 7월 18일, 산청군 시천면 설통바위라는 곳에서 빨치산의 습격으로 한국군 몇이 사망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히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5사단 3연대 2대대는 인근 마을 사람들을 시켜 사망한 국군들의 시신을 수습하게 했는데 그 가운데 청년 6명을 행동이 느리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시천면과 삼장면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1950년 1월 주둔 부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지역 주민에 대한 지속적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신천초등학교와 덕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선 주민들을 집결시켜놓고 눈을 감게 한 뒤 빨치산에게 밥을 주거나 짐을 실어준 사람에게 손을 들게 한 뒤 손을 든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외공리에서는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 많은 주민들이 불에 타 숨졌다.
토벌군은 신천초등학교에서도 주민들을 모아놓고 색출과 학살을 저질렀다.
위령비는 학살이 있었던 신천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시천천 천변에 세워져 있다. 난몰주민위령비(亂沒住民慰靈碑)라는 이름이 주는 느 낌은 다른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 랐다. 위령비에는 건립일이 광복 50주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1995년이면 아직 가해자가 한국군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걸까. 그랬기에 난리(亂)통에 일어난 죽음(沒)이라고밖에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난몰이라는 이름에서 꾹꾹 눌러 담은 서글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 시기 다시 학살을 겪어야 했다. 산청 지역이 빨치산 토벌 지역인 까닭이었다.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선이 고착되자 이승만 정권은 다시 후방의 적인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선다. 그 중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던 백선엽야전사령부의 빨치산 토벌작전은 1951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진행되었다. 같은 시기 토벌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 역시 토벌의 대 상이 되었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하리에 살던 조재현 씨의 가족 역시 그 과정에서 학살당했다. 토벌군이 들어오면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에 조재현 씨 가족은 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한국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온몸이 부서져 사망했고, 손주 며느리와 두 살배기 아이가 총살당했다. 붙잡힌 가족들은 산청 시천면 신천국민학교에 구금되었 다가 포로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당시 아이였던 조재현 씨와 할머니, 숙모, 조카는 광주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할머니와 숙모, 조카는 수용소에서 병으로 사망했고 조재현 씨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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