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소개
매곡동 학살지 안내판
어스름한 저녁, 군인들이 매곡동에 들이닥쳤다. 갑작스레 출현한 군인들을 내다보던 사람들,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 겁이 나 숨어있던 사람들… 군인은 집집마다 사람을 끌어내 매산중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그날 26명이 총살되었다.
학살의 현장은 피바다였다. 냄새가 진동해 쑥을 피워놓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하면서 선교사 엘머 보이어(Elmer T. Boyer, 한국명-보이열)가 페니실린 병에 죽은 이의 이름을 넣어 시신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찾을 수 있도록.
60년 후인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현장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간 페니실린 병도 찾을 수 없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며 변해버린 지형에서 사람들을 묻었던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산여고 옆 길가에는 그 날의 기억을 설명하는 안내판과 페니실린 병을 상징하는 아크릴 조각이 빼곡하게 꽂힌 벽이 세워져 있다. 한여름 햇볕에 아크릴 병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보이열 목사가 당시 매곡동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이름을 페니실린 병에 넣었다는 것을 조형화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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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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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소개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
서국민학교(현 서초등학교),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등지에서 선별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거나 오동도와 애기섬, 만성리 등 여수 외곽 곳 곳에서 학살당했다. 현재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가 세워진 곳은 원래 구덩이였다. 토벌군은 이 구덩이에 사람들을 밀어 넣어 죽였다. 혹시 생존자가 있을까 봐 기름을 부어 불까지 붙였다.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길에 만성리 형제묘가 있다. 형제묘 위령비 뒤에 불룩 솟아 있는 커다란 봉분이 바로 형제묘다. 형제묘도 원래 구덩이였다. 사남매 중 장남 정기만은 함께 학살된 125명의 사람들과 형제묘 에 묻혀 있다. 둘째 정기순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셋째 정기덕은 인구부 전투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 막내 정기옥은 살아남았지만 모진 삶을 살다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정기옥은 큰 형 정기만이 묻힌 형제묘 맞은편 구석에 있는 작은 묘에 묻혔다. 정기옥의 묘비에는 정기만의 이름도 함께 적혀 있다.
지금은 묘비가 세워져 있지만, 예전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형제묘이요 이곳에 묘를 쓰지 마시오’
고 정기만 지묘, 고 정기옥 지묘라고 적혀 있다. 정기옥은 정기만, 정기순, 정기덕, 정기옥 4남매의 막내다. 정기만은 형제묘에 묻혔고, 이곳에는 정기옥이 묻혔다.
답사를 맡아준 주철희 박사는 여수 토박이다. 만성리 해수욕장은 검은 모래로 유명한 곳인데, 어릴 적 이곳으로 친구들과 놀러갈 때면 어른들이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굴(마래터널) 지나면 움푹 파인 구덩이 하나 있다. 지나다 돌이나 하나 던져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성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던 것일까. 그 마음들은 그렇게 돌탑이 되어 쌓여갔다.
‘1948년 10월 19일 …… 2009년 10월 19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뒷면에 적혀 있는 글이다. 여순항쟁의 시작일과 위령비 건립일 사이에는 침묵의 말줄임 표만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세우며 여수시의 공무원이 ‘학살’이라는 말을 빼자고 완강히 버텼다 한다. 한 시인의 제안으로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줄임표를 새겼다.
차마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기에, 여섯 개의 마침표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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