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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형무소 터

광역지방자치단체
전라남도
기초지방자치단체
목포시
사건연도
1950
가해주체
사건유형
세부사건
장소유형
비석/탑
1 more property

위치

목포시 양을로79번길 24에서 출발

장소 소개

등산로 초입에 수인들의 묘비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지인의 안내로 어렵사리 찾아간 곳에는 몇 개의 묘비석과 일제시기 세운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예전 목포형무소가 있던 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옆으로 난 작은 산책로가 아마 공동 묘지 자리였을 것이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살펴보면 광주, 군산, 목포 등 전라도 지역의 형무소에서 한국전쟁 전후 시기 일어난 재소자 희생사건을 찾을 수 있다. 진실규명 신청이 된 사건에 한하긴 하지만 최소 18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제주4.3과 여순항쟁 관련자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많은 좌익혐의자들이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되 었다. 1948년 11월 한 달 동안에만 5차례의 군법회의를 통해 1,350여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는 알기 어렵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광주형무소에는 1,700여 명, 목포와 전주형무소에는 1,000여 명, 군산형무소에는 900여 명의 재소자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이 중 좌익사범의 비율은 역시 알기 어렵다. 다만 수용인원의 절반 이 정치범들이었다는 당시 목포형무소 간부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전국의 형무소에는 소개(疏開)명령이 떨어 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재소자 행방불명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광주형무소의 경우 전쟁 발발 직후 3,000여 명의 재소자가 있었다. 1950년 7월 23일 군 당국의 형무소 소개명령에 따라 직원들이 재소자를 일시 석방 한 후 대피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은 없다. 다만 퇴각하기 직전 여러 날에 걸쳐 좌익사범들이 헌병들에 불려나갔고 광주시 산동교 인근에서 사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진술이 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목포형무소에서는 두 차례의 대규모 탈옥사건이 있었다. 탈옥 과정에서 많은 재소자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탈옥은 1949년 9월 14일이었다. 1,400여 명의 재소자 중 413명이 탈옥했고 이후 목포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탈옥자 85명을 체포하고 298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탈옥자 검거에 나선 해군과 경찰은 목포형무소 인근에서 대부분의 인원을 사살해 구덩이에 합장했다고 한다. 기록이 남지 않아 시신은 몇 구인 지 알 수 없다. 두 번째 탈옥은 한국전쟁 시기에 일어났다. 1951년 법무부 검찰과의 문건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목포형무소에서 탈옥한 527명의 형기와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당시 간수들은 탈옥은 없었다는 상반된 주장을 했다. 527명의 탈옥자 중 22명에 대해 진실규명이 이루어졌는데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은 소위 사상범들이었다.
형무소에 갇혀있다 죽임당한 사람들, 목격자도 없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없었다. 단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합장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뒤편에는 수인들을 묻은 날짜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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