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부터 단독정부 수립 이후까지 정부가 탄압하고 구금했던 소위 ‘반국가세력’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불과 서너달 만에 광범위하게 학살한 사건입니다.
미군정과 남한 정부는 1946년 대구10월항쟁, 1948년의 제주4.3과 여순항쟁 등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저항의 시도에 참여해 온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각지의 형무소에 구금당했습니다.
보도연맹은 1949년 4월 20일, 탄압의 과정에서 살아남은 좌익세력을 남한 정부가 ‘보호하고(보호할 보保) 올바른 길로 이끌어(인도할 도導)’ 국민으로 만든다는, 즉 전향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관변단체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창설과 운영 전반에 관여하는 정부 주도의 단체였습니다.
초기에는 좌익 이령이 있는 이들만 맹원으로 모집했지만, 이후로는 각 지방 경찰서에 맹원 가입 할당량이 주어져 좌익 활동과 무관한 이들까지 협박과 강요, 식량 배급 등 혜택을 미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국민’으로 인도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빨갱이’ 이력을 가진 감시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수시로 소집되기도 했습니다.
전쟁 직전 총 맹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맹원 명부는 바로 살생부가 되었습니다. 곧바로 예비검속되어 경찰서 유치장, 창고, 학교, 형무소 등에 구금되었고 적법한 절차 없이 현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대부분 즉결처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살은 전쟁 때까지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소위 좌익이력으로 구금된 재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졌습니다.
가해자는 군인·경찰·육군정보국 CIC·우익단체(치안대) 등으로, 야산이나 골짜기 등에서 학살을 벌였고 해안 마을의 경우에는 바다에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학살을 ‘예방학살’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뚜렷한 범죄 행위 없이 ‘잠재적 위험’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십 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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